스카치위스키
초기의 숙성된 위스키는 비록 품질은 최상급이었으나 생산량이 적어서 가격이 너무나 비쌌다.
종전까지 생산된 전통적인 위스키는 맥아만을 원료로 썼으며, 증류 또한 단식 증류기(Pot Still)만을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단식 증류기는 양파모양으로 생긴 구리솥으로 세계 어느 나라에서나 거의 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
단식 증류기로 증류를 하기 위해서는 발효액을 증류기에 한꺼번에 넣고 끓여야 하며, 1차 증류된 액을 2차 증류해야만 비로소 위스키 원액을 얻을 수 있어서 생산성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그러나 증류시에 위스키의 품질에 절대적인 영향을 주는 성분들의 함량을 조절할 수 있으므로 이 증류기로 생산한 위스키는 대체로 향이 풍부하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었다.
이렇게 제조된 위스키를 ‘몰트 위스키(Malt Whisky)’라 한다.
산업혁명이 급진전되면서 잉글랜드 지방에서 위스키의 수요가 급격히 늘어나게 되자 위스키 제조업자들은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여러 가지 시도를 했다.
아일랜드에서 영국으로 이민 온 애니어스 카피(Aeneas Coffey)는 1831년 발효액을 연속해서 투입하여 증류액을 얻는 연속식 증류기를 고안하여 특허를 얻었다.
그는 이 증류기를 가지고 소량의 맥아를 사용하여 보리, 옥수수, 밀 등의 곡물을 당화, 발효시켜서 대량의 위스키를 생산하게 되었다.
이것을 ‘그레인 위스키(Grain Whisky)’라고 한다.
이 증류기는 오늘날 알코올증류뿐만 아니라 석유화학 공업에서 사용하는 산업용 증류기의 모체가 되기도 했다.
이런 방식으로 생산된 위스키는 가격은 싸지만 향이 약하여 품질 면에서 전통적인 몰트 위스키를 따를 수가 없었다.
1800년대에 들어와 위스키는 대도시의 상인들에 의하여 유통되기 시작했다.
이들은 위스키 제조업자들로부터 원액을 구입하여 자기 상표를 붙여 판매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이들은 향이 강한 몰트 위스키와 값싼 그레인 위스키를 블렌딩하여 소비자의 요구에 적합한 위스키를 만들었다.
이것을 ‘블렌디드 위스키(Blended Whisky)’라 하며 오늘날 스카치 위스키의 약 97%를 점유하고 있다.
오늘날 스코틀랜드에는 약 100개의 몰트 위스키 증류 공장과 10개 정도의 대형 그레인 위스키 공장이 있다.
각 스카치 위스키 회사는 이들 공장으로부터 원액을 구입하여 블렌디드 위스키를 제조한다.
스카치 위스키가 발달할 수 있었던 배경은 해안을 따라 양질의 보리가 생산되었으며, 강에는 맑고 풍부한 연수가 넘쳐흘렀고, 산 구릉에는 연료인 이탄(peat)이 무진장 널려 있는 천혜의 자연 환경 덕택이라 할 수 있다.
스카치 위스키의 특색은 맥아 건조시 이탄으로부터 옮겨진 풍부한 향을 가지고 있으며, 장기적인 숙성으로 인하여 뒤끝이 깨끗하다는 점이다.
투명한 호박색의 스카치 위스키야말로 실로 증류주의 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아메리칸 위스키
1770년대 미국 중동부 미시시피강 유역의 켄터키, 버지니아, 일리노이 지역에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로부터 온 이민자들이 정착했는데, 이들은 라이(Rye: 호밀)를 가지고 위스키를 만들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생산된 라이 위스키는 초기에는 서인도 제도에서 생산되는 럼과 치열한 경쟁을 했다.
그러나 1780년대 말에 들어서면서 위스키는 미국 국민들이 가장 선호하는 증류주로서 확고하게 자리를 굳히게 되었다.
1791년 재무성의 초대 장관인 알렉산더 해밀턴은 조세 수입 확보를 위해 위스키에 고액의 세금을 부과했는데 이듬해에 폭동이 일어나는 바람에 세금을 대폭 삭감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당시의 대통령이던 워싱턴이 버지니아 주의 마운트 버넌 근방에 상당히 평판이 좋은 라이 위스키 증류소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3대 대통령인 제퍼슨 역시 라이 위스키 공장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제퍼슨은 스스로가 조예깊은 증류 기술자였으며 자기가 생산한 위스키에 대해 커다란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1783년 켄터키의 버번(Bourbon) 카운티에서는 옥수수로 양조한 위스키가 생산되었는데 소비자들은 라이 위스키보다 이 위스키를 더 좋아했다.
이 지역에서 생산되는 옥수수 위스키는 버번 위스키라 불리게 되었는데 버번 위스키는 라이 위스키에 비해 맛이 부드럽고 가벼웠다.
당시 버번 위스키는 인디언들과의 물물교환 거래에서 현금 대용으로 사용되었다.
인디언들은 위스키를 매우 좋아해서, 비버, 여우, 곰 등의 모피와 교환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한때 위스키의 수요는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인디언의 세계에는 원래 술이라는 게 없었다.
1610년 허드슨 강가에 메이 플라워 호가 상륙했을 때 인디언 추장에게 처음으로 위스키가 전달되었었다.
인디언 추장은 이 술을 마시고 대취했는데, 그 때문에 그 지역을 ‘처음으로 대취한 곳’이라는 뜻의 인디언 말인 맨해튼(Manhattan)이라고 불렀다.
안타까운 이야기지만 인디언들은 무엇이든지 다 떨어질 때까지 나누어 먹는 풍습이 있었으므로 인디언 사회에서는 알코올 중독자가 양산되었다.
한편 연속식 증류기가 미국에 소개되자 대부분의 미국 위스키가 이 증류기에 의해 대량 생산되기 시작했다.
서부의 질 좋은 오크통에 담아서 1~2년 동안 숙성시킨 버번 위스키는 순식간에 미국 전역을 석권했다.
이로부터 약 1세기 후 미국 사회에서는 알코올의 유해성에 대해서 논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윽고 1920년부터 14년간 금주령이 시행되었다.
그러나 금주령이 시행되는 동안 온갖 폭력과 밀조, 범죄, 그리고 마약이 성행하게 되면서 사람들은 차라리 금주령 이전의 상태가 낫다고 믿게 되었다.
아메리칸 위스키 : 아메리칸 위스키는 약간 단맛이 있고 가벼우며 부드러운 특성이 있는데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다. → 버번 위스키(Bourbon Whisky): 원료 중 옥수수를 51% 이상 사용해야 하며, 원액은 80% 미만으로 증류되고, 내부를 태운 새 오크통에서 2년 정도 숙성되어야 한다. → 콘 위스키(Corn Whisky): 원료 중 옥수수를 80% 이상 사용해야 하며 이미 사용된 오크통에서 숙성되어야 한다. → 라이 위스키(Rye Whisky): 원료 중 귀리를 51% 이상 사용해야 하며, 원액은 80% 미만으로 증류되고, 숙성에는 내부를 태운 새 오크통을 써야 한다. → 테네시 위스키(Tennessee Whisky): 버번 위스키와 동일한 방법으로 제조하여 목탄으로 여과한다. 일반적으로 버번보다 고급이다. |
우여곡절 끝에 금주령이 해제된 후 캐나다와 유럽의 주류 회사들이 대거 미국으로 진출하였다.
오늘날 대부분의 미국 위스키 회사들은 그들의 후예들이 운영하고 있다.
아이리시 위스키
12세기에 헨리 2세의 잉글랜드 군대가 아일랜드를 침공했을 당시에 아일랜드에는 이미 위스키가 존재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아일랜드인들은 위스키의 고향이 아일랜드라고 주장한다.
아이리시 위스키는 탄생의 역사적인 배경이나 자연 조건의 측면에서 스카치 위스키와 유사하다.
그러나 아이리시 위스키 제조에 사용하는 원료는 스카치 위스키와 다른다.
대부분의 스카치 위스키는 몰트 위스키와 그레인 위스키를 따로 숙성하여 최종적으로 블렌딩한 것이다.
그러나 아이리시 위스키는 당화나 발효시에 몰트에 보리, 호밀, 밀 등의 그레인을 섞어 발효액을 만든 다음 대형의 단식 증류기를 사용하여 3회에 걸쳐 증류한다.
따라서 아이리시 위스키에는 블렌디드 위스키가 없다고 할 수 있다.
아이리시 몰트는 이탄 훈연(燻煙)을 전혀 하지 않기 때문에 향이 깨끗하고 맛이 부드럽다.
대한제국 시절 서구 열강에 문호를 개방하면서 외국 공관과 함께 서구의 문물이 물밀듯이 밀려 들어왔다.
아마 이 시기에 위스키가 처음 도입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후 해방과 함께 우리나라에 미군이 주둔하게 되면서 이때 군 매점을 통해 위스키가 시중으로 유출되었다.
그 기막힌 맛에 매료된 사람들의 수요를 충족하기 위하여 50~50년대에는 소주에 색소를 섞은 가짜 위스키가 유행을 했다.
70년대 들어 우리나라 경제가 크게 도약을 하면서 이때 기업가들의 접대용으로 처음 국산 위스키가 발매되었다.
그 효시는 1976년 백화 양조에서 개발한 ‘조지 드레이크’였다.
그러나 이 술은 위스키 원액을 수입하여 거기에 주정을 섞은 유사 위스키로서 주세법상으로는 기타 재제주로 분류되었다.
그러다가 1978년에 역시 기타 재제주인 베리나인이 개발되면서 1984년까지 위스키 시장을 석권하다시피 했다.
세계적인 기준에 맞는 원액 함량 100% 위스키는 1984년도에 처음으로 개발되었다.
88서울올림픽에 대비하여 위스키의 주질을 향상시켜야 할 필요성을 느낀 정부에서 원액 함량 100% 위스키 개발을 승인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당시 위스키 3사(베리나인, 진로 위스키, 오비 씨그램)가 같은 시기에 스코틀랜드의 스카치 위스키 메이커들과 제휴, 몰트 위스키와 그레인 위스키를 수입하여 독자적으로 블렌딩한 원액 함량 100% 위스키를 개발하였다.
패스포트, 비아이피(VIP), 썸싱 스페셜이 이때 나온 제품들이다. 그 가운데 시장 점유율이 가장 높은 제품은 패스포트였다.
위스키 3사는 1980년대 초반 위스키 원액을 국산화하기 위하여 원액 제조설비를 갖추고 생산을 개시했으나, 국산 원액은 가격 경쟁력을 갖지 못한 탓으로 5~6년 후 생산이 중단되고 말았다.
1991년 주류의 수입이 개방되면서 세계 각국의 양주류가 대량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이에 따라 국내의 위스키 회사들도 기존 위스키와의 차별화를 위해 원액의 주령인 12년인 신제품을 개발하여 시장에 내놓기 시작했다.
1994년에 나온 진로의 ‘임페리얼’과 1996년에 생산되기 시작한 두산 씨그램의 ‘윈저’가 국내 브랜드로서 상당한 명성을 얻었다.
수입 위스키로서 시장 점유율이 높은 것은 시바스 리걸, 딤플, 발랜타인 등을 손꼽을 수 있다.
일본 위스키 하면 자연스레 산토리와 니카를 떠올리게 된다.
1899년 도리이 신지로는 오늘날 산토리사의 전신인 합성주 판매점을 창업하였다.
산토리는 1923년 일본인으로서는 최초로 스코틀랜드에 유학하여 양조 기술을 배우고 귀국한 다케스루를 채용, 교토의 야마자키에 위스키 공장을 지었다.
8년 후 ‘산토리 화이트’라는 첫 제품을 냈으나 결과는 참담한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에 굴하지 않고 1937년에 들어 ‘산토리 올드’를 개발하였는데 이것이 성공을 거두었다.
산토리 공장을 지은 다케스루는 도리이와 뜻이 맞지 않아 산토리를 그만 두고 1934년 니카 위스키를 창업하였다.
그는 스코틀랜드와 기후가 유사한 북해도의 요이치 시에 공장을 세웠고 그때부터 산토리와 니카는 숙명적인 경쟁을 벌이게 되었다.
1964년 도쿄 올림픽을 계기로 일본 위스키 업계는 대대적인 위스키 붐을 조성하였다.
이때 위스키 업체들은 중간 가격의 신제품을 개발했는데 그것이 ‘산토리 레드’와 ‘하이니카’였다.
일본의 양주는 올림픽 이전에는 유흥업소에서만 소비되었으나 산토리와 니카가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가정에서의 소비도 크게 늘어나게 되었다.
그후 1983년까지 일본의 위스키 시장은 가파른 성장을 지속했다.
산토리는 앞장서서 일본의 양주 소비 문화를 창조해 갔는데 이른바 젓가락 작전이 그 하나였다.
즉 위스키는 일본 음식과 잘 어울리기 때문에 젓가락으로 식사를 하면서 위스키를 반주로 마시라는 내용으로 대대적인 홍보작전을 전개했고, 이것이 적중하게 된 것이다.
또한 산토리 사에서는 독한 술을 좋아하지 않는 일본식 음주 문화에 착안하여 위스키에 물을 타서 마시는 ‘미즈와리(水割: 물로 희석한 위스키)’를 개발하여 보급시키기도 했다.
이처럼 산토리는 오늘날 일본인들에게 생활의 즐거움과 활력을 주는 회사의 이미지를 구축하는 데 성공을 거두었다.
한편 니카는 창업자인 다케스루의 품질 지상주의 정신을 반영하여 최고의 품질을 지닌 정통 위스키의 이미지를 구축하였다.
그는 스코틀랜드의 위스키 제조 방법을 완벽하게 모방하였다.
오늘날 산토리와 니카는 양주를 위주로 한 음주 문화를 보급시킴으로써 일본인들에게 아주 좋고 친숙한 기업으로서의 이미지를 구축하고 있다.
이들 두 회사의 경쟁을 통해 일본 위스키는 세계 5대 위스키의 반열에 자리를 함께 하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