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의 숙성기간
70년대만 해도 시골에서는 집안의 대소사에 직접 술을 담가 마시는 거이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명절이나 제사 또는 혼사나 회갑연에 쓸 술을 담그기 위해서는 보통 한 달 전부터 준비를 해야 했다.
술독에 술을 담근 후부터 마실 수 있게 될 때까지 걸린 기간을 술의 나이라고 한다면 이런 가용주들의 나이는 기껏해야 1개월 정도일 것이다.
인삼, 모과 등의 약재를 소주에 담근 침출주의 나이는 저장 기간에 따라 몇 년이 될 수도 있다.
귀한 손님을 대접할 때 술병을 꺼내 놓고 “이 술 3년 묵은 거야.” 하면서 자랑하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한편 소주(증류주) 제조법이 발명된 이후의 고분에서 나온 술병의 술이나, 밀조꾼들이 동굴에 감춰 놓았다가 후에 발견된 술들 중에는 나이가 수백년이 되는 것도 있다.
증류주가 나오기 이전에는 술이 오래 묵으면 썩어 버리는 관계로 겨울철에는 3~4개월 정도 저장할 수는 있지만 무더운 여름철에는 기껏해야 2~3일밖에 보관할 수 없었다.
일반적으로 알코올 농도가 13% 이하일 때는 미생물이 번식할 수 있다. 특히 초산균이나 젖산균이 번식하여 소위 식초가 되어 버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따라서 오래된 술이 귀할 수밖에 없었다.
오래된 술을 귀하게 여긴 또 하나의 이유는 술을 (썩히지 않고) 오래 묵히면 향이 좋아지고 맛이 부드러워지기 때문이다. 술의 원천인 알코올 발효시에는 메틸 알코올, 아세트 알데히드, 에틸 에스테르와 같은 미량의 성분들도 함께 만들어진다.
그런데 알코올 발효가 어느 정도 진행된 후에 온도를 낮추어 발효가 서서히 진행되도록 하면 술의 향미가 좋아진다. ‘술이 익는다’라는 말은 바로 이러한 현상을 일컫는 것이다. 증류주는 목통에 저장해서 숙성을 시키는데 이 숙성 기간을 주령(酒齡: 술의 나이)이라고 한다.
위스키나 브랜디는 오크통에서 숙성되는데 숙성을 하면 우선 통에서 색이 우러난다.
보통 오크통을 새로 만들었을 때는 내부를 불로 그을려 태운다.
오크통의 두께는 3cm인데 그을리는 부분의 두께는 2~3mm 정도이다. 그을려진 오크통 내부의 표피는 미세한 숯 알갱이와 그을려진 조각들로 변화된다.
이 작은 조각들로부터 갈색의 색소와 목질의 성분인 리그닌, 그리고 분해 산물인 방향족(芳香族)의 분자들이 우러나게 된다.
탄화된 부분은 숯처럼 숙취를 많이 일으키는 성분들을 흡착하여 술을 순화시켜 준다. 또한 술 속에 함유되어 있는 수백 가지 성분들은 서로 화학반응을 일으켜서 향기가 좋은 성분들로 바뀌고 맛도 부드러워지는 것이다. 숙성 중의 변화는 대략 다음 그래프와 같이 진행된다.
즉, 바람직한 향미 성분은 서서히 증가하여 12년에 이르면 숙성이 거의 완결되어 술은 매우 부드럽고 향기로워진다.
술 속의 숙취를 많이 일으키는 휴젤 오일(Fusel oil) 등은 숙성이 진행됨에 따라 급격히 줄어든다. 또한 색깔은 초기에 급격히 짙어지며 숙성이 진행될수록 비례적으로 짙어진다. 물론 숙성 중에 자연 증발이 되어 술의 양은 11°C에 2~4%씩 감소된다.
우리나라는 88올림픽을 전후하여 위스키 음용량이 매년 20% 이상씩 증가하면서 술의 나이에 관한 관심도 크게 높아졌다. 1991년부터 양주류의 수입이 개방되면서 우리나라 시장으로 세계 각국의 술이 밀려 들어오기 시작했다.
판매업체에서는 일반적으로 나이를 기준으로 품질의 우수성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주령이 높다고 해서 반드시 술의 품질이 우수한 것은 아니다. 숙성 이전에 어떤 원료를 썼으며, 어떤 제조 공법을 거쳤는지가 더욱 중요하다.
앞 표에서 알 수 있듯이 일반적으로 증류주를 목통에 숙성시킬 때는 통상 12년이면 숙성이 완료되며, 더 이상 숙성을 하는 경우 목통에서 원하지 않는 성분이 지나치게 우러나서 오히려 풍미가 손상되는 경우도 있다. 진정한 술꾼이라면 자기 입맛에 맞는 술이 최고지 굳이 술의 나이 논쟁에 휩싸일 필요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