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0년대에 네덜란드의 라이덴 대학 약학 교수이던 프란시스코 살바우스 박사는 약재와 알코올을 이용해서 약술을 만들었다.
그는 이뇨제로 알려진 주니퍼 베리(노간주열매)의 약효에 주목하고 이를 알코올에 담구어 침출시킨 후 증류하여 약국에서 팔도록 했다.
이 약은 해열 및 이뇨작용이 뛰어나 날개 돋힌 듯이 팔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겨울이 길고 흐린 날이 많은 네덜란드의 사람들, 특히 애주가들은 이 약품을 아예 술로서 마시기 시작했다.
이 술은 주니버(Geneva)와인이라 불리었는데, 이것이 17세기 말경 영국으로 전파되면서 진(Gin)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17세기 말 네덜란드 출신으로 영국 왕에 즉위한 윌리엄 3세는 진을 즐겨 마셨다.
그는 이 술을 널리 보급시키기 위해 진의 주세를 크게 내렸다. 그 덕분에 진은 일반 노동자들의 술로 널리 음용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진은 ‘제왕이 부럽지 않은 가난(ROYAL POVERTY)’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아무리 가난한 사람이라도 이 술을 마시고 취하면 제왕같은 기분을 낼 수 있다는 이야기인 것이다.
그런데 가난한 사람들이 왕이 된 기분을 만끽하기 위해 너도나도 이 술을 마시는 바람에 영국이 어느새 주정뱅이들의 국가로 변모했다는 웃지 못할 에피소드도 있다.
진을 제조하는 방법에는 런던 타입과 네덜란드 타입이 있다.
19세기 들어 연속식 증류기가 개발되면서 영국에서는 옥수수, 대맥, 아이보리 등을 원료로 고농도의 알코올을 만들고, 주니퍼 베리, 커리 앤 시이즈 등으로 향기를 낸 진을 제조하기 시작했다.
이 술은 숙성을 시키지 않기 때문에 무색 투명하고 맛이 산뜻하며 드라이하다. 이에 비해 네덜란드에서는 전통적인 제법을 고수하여 중후한 풍미의 진을 제조하고 있다.
오늘날 진이라고 하면 런던 타입으로 만든 것을 가리키며 이름도 통상 ‘드라이 진’이라고 부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진이 대량으로 소비되기 시작한 것은 80년대 중반이었다.
진토닉 등 진을 이용한 칵테일이 크게 유행했는데 진을 너무 많이 마셔서 숙취에 시달린 술꾼들도 많았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겠으나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당시의 권력자들은 소주, 진(현재는 일반증류주, 당시에는 기타 재제주로 분류되었음), 막걸리 등의 주세를 낮게 매겨서 일반 서민이 싼 값에 술을 많이 마실 수 있게 하는 정책을 펼쳤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말을 할 수 없었던 대중들은 술 한잔으로 울분을 달래야 하는 시절이었다.
정통성을 갖지 못한 통치자들이 서민을 달래는 수단의 하나로 값싼 술을 공급하게 했던 게 아닐까 싶다.
이 땅의 술꾼들이 값싼 대중주로 진을 마실 수 있었던 시절을 떠올리며 아마도 이것이 윌리엄 3세로부터 배운 고도이 정치적 술수가 아니었을까 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진은 특유의 주니퍼 향기와 상큼한 뒷맛을 가지고 있어서 한두 잔 정도 마시기에는 그지없이 좋은 술이다.
그러나 진을 많이 마시면 술 속에 함유된 약효가 발동되어 오히려 몸에 좋이 않을 수도 있다.
일주일의 피곤한 일과를 마치고 주말 저녁에 부부나 연인이 마주 앉아 레몬즙 한방울을 곁들인 진토닉을 앞에 놓고 담소를 나누면 진의 참맛을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청주는 글자 그대로 맑은 술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보다 훨씬 맑은 술이 보드카이다. 따라서 진정한 청주는 바로 보드카라고 할 수 있다.
보드카의 어원은 즈이즈네니야 바다(생명의 물)에서 물을 뜻하는 바다가 애칭형인 보드카로 변한 것이다.
따라서 그 의미는 위스키나 브랜디와 마찬가지로 Aqua Vita(생명의 물)이다.
보드카는 오랜 세월에 걸쳐 러시아인들의 사랑을 받아 온 술이다.
왠지 이름에서부터 광활한 러시아의 설원(雪園) 풍경이 떠오르는 것만 같다.
눈보라 치는 시베리아의 설원을 헤치며 썰매를 타고 온, 털외투를 입고 못수염에 고드름을 매단 거한들이 마시는 술, 그것이 바로 보드카라고 생각하면 된다.
보드카는 이미 12~13세기경부터 러시아에서 생산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당시에는 보드카의 원료인 옥수수나 감자, 혹은 라이 보리 등이 러시아에서 재배되지 않고 있을 때이므로 원료가 무엇이었을까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그 무렵의 보드카는 벌꿀을 원료로 하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러시아의 공산 체제하에서도 보드카를 다량으로 소비했다.
마지막 서기장으로서 자유화의 영웅이었던 고르바초프는 실은 보드카 금주를 실현시키려다 실각당했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로 보드카는 러시아인들의 사랑을 받는 술이다.
그의 뒤를 이어서 러시아의 초대 대통령이 된 보리스 옐친은 에이레를 방문했을 당시 보드카를 과음하여 정상회담을 연기한 적도 있을 정도로 광적인 보드카 애호가로 알려져 있다.
보드카는 러시아 전역에서 풍부하게 생산되는 옥수수, 감자, 밀, 보리 등을 발효시켜 양조한다. 이 거친 술은 연속식 증류기에 의해 알코올 농도 85%의 주정으로 증류된다.
갓 증류된 보드카는 물과 희석시킨 다음 한대림에서 많이 나는 자작나무 숯으로 여과시킨다.
자작나무 숯은 참나무 숯과 함께 가장 훌륭한 숯으로 알려져 있다. 이 여과 과정을 통해 술에 녹아 있는 일체의 향미 성분이 제거된다.
이 과정을 통해 거의 순수한 주정에 가까운, 크리스탈과도 같이 빛나는 무색, 무미, 무취의 술 보드카가 탄생되는 것이다.
구 소련의 유명한 보드카는 스미로노프(Smirnoff)인데 미국으로 이민 간 스미르노프가의 후손이 미국에서 제조한 스미르노프 보드카가 역으로 러시아에 수입되어 시판되고 있어 러시아 보드카의 자존심을 건드리기도 했다.
보드카는 순수한 알코올 그 자체여서 무미 건조하기 때문에 술의 향과 맛 그리고 빛깔을 음미하는 데는 적합하지 않다. 그러나 칵테일이 널리 보급되면서 보드카는 오히려 무미 건조하다는 특성으로 인해 칵테일 베이스로서 크게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체리, 레몬 등의 향미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보드카와 칵테일 등으로 좋아하는 과일의 향미와 술을 함께 즐길 수 있다. 이것이 보드카가 가진 최대의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가장 맛없는 술을 이용하여 정말 맛있는 술을 만드는 아이러니가 보드카의 세계 속에 들어 있다.
북국의 술 앱솔루트(Absolut)와 핀란디아(Finandia)
동서양을 막론하고 눈을 싫어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사람들이 눈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 하얀색의 순수함에 있지 않을까 싶다.
기나긴 겨울을 눈 속에서 사는 북구인들은 대체로 독주를 즐기는 편인데, 아마도 독주의 열기와 설국의 정취 속에 한데 어우러지는 그 무엇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북구 사람들은 주로 담백하고 순수한 보드카 계통의 술을 마시는데, 그 가운데 스웨덴의 앱솔루트(Absolut)와 핀란드의 핀란디아는 북구에서 생산되는 보드카의 백미로 인정을 받고 있다.
1879년에 개발된 앱솔루트는 스웨덴 남부의 윤택한 대지에서 생산된 밀을 원시의 침엽수림을 통과한 깨끗한 물로 양조하여 증류한 그레인 보드카이다.
술과 체온
험준한 알프스 산악에서 조난 사고가 나면 구조대의 대원으로 견공이 합세한다. 이 개는 대개 세인트 버나드종으로서 송아지만큼 크고, 뛰어난 후각으로 조난자의 위치를 빠르게 찾아낸다. 개의 목에는 수통이 달려 있는데 그 통에는 브랜디가 담겨 있고, 개는 브랜디를 조난자가 마실 수 있도록 도와준다. 조난자가 온기를 회복하여 희망을 잃지 않고 기다리는 사이 구조대가 도착하여 구해 낸다. 이것은 알프스 산록에 있는 수도원 수사들이 조난자를 구하기 위한 지혜에서 비롯되었다. 여기서 한잔의 브랜디는 추위에 떠는 조난자에게 온기를 주고 생명을 소생시키는 생명수로 여겨진다. 겨울이 춥고 긴 러시아의 사람들은 보드카를 좋아한다. 추위를 이기는 데는 입에서 불이 나는 듯한 독주가 제격이라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만주 지방에 독한 고량주가 발달한 것이나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의 위스키가 유명한 것은 이러한 생각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술을 먹으면 체온은 내려가게 된다. 추울 때 체온이 강하하면 외기온도와의 차가 줄어들어 추위를 덜 느끼게 되는 데서 이러한 습속이 비롯된 것이 아닌가 싶다. |
앱솔루트는 병 디자인이 단순하면서도 강한 이미지를 풍기고 있으며, 상표를 병에 직접 인쇄하여 병 속의 맑고 투명한 액이 그대로 보이도록 했기 때문에 일반적인 보드카의 이미지에 가장 잘 어울리는 술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병에서 풍기는 이미지와는 대조적으로 앱솔루트는 매우 마일드한 술이라는 특색을 가지고 있다.
앱솔루트는 병을 의인화하여 병에 나비 넥타이를 맨 모양을 광고한 것으로 유명하다.
스웨덴과 같이 북구에 위치한 핀란드산 보드카인 핀란디아(FILANDIA)는 숲과 호수 사이의 평원에서 풍부하게 생산되는 밀과 보리 등 100% 곡물만을 사용하여 만든 술이다.
고드름을 디자인한 무늬로 장식한 핀란디아의 병은 차고 순수한 이미지를 갖고 있다.
핀란드인들은 핀란디아를 ‘흰 영양(羚羊)의 밀크’라 부르는데 그들은 한여름의 길고 긴 백야(白夜)를 보드카와 함께 지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백야에 흰 순록 두 마리가 힘겨루기 하는 모습을 상표에 새기고 있다.
일반적으로 보드카가 그러하듯이 앱솔루트와 핀란디아는 주로 칵테일의 베이스로 많이 이용된다.
이를 이용하여 만든 대표적 칵테일인 스크루 드라이버(Screwdriver)는 보드카와 오렌지 쥬스를 2대 5의 비율로 섞고 얼음을 넣은 다음 긴 칵테일잔 상단에 오렌지 슬라이스 한쪽을 끼운 것이다.
처음에는 거의 술맛을 느끼지 못할 정도이기 때문에 이름이 풍기는 이미지처럼 여성을 취하게 만들어 유혹하기에 좋은 술이라고 알려져 왔지만 실상 그러한 목적에서 만들어진 술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