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어렸을 때 이야기 이다. 명절이나 제사 때에는 집집마다 가양주를 몰래 담갔다.
그때는 집에서 술을 담그는 것이 불법이었으므로 단속원에게 적발되면 벌금을 무는 등 곤욕을 치렀다. 일제시대에도 그랬다 한다.
18세기 초 대영제국이 탄생된 후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의 간섭을 많이 받았다.
특히 위스키에 무거운 세금을 매겼으므로 스카치위스키 제조업자들은 산간 오지로 숨어서 밀조를 하기 시작했다.
스코트인들과 잉글랜드인들은 견원지간이었다. 그때부터 100여 년간 세리들과 밀조업자들은 목숨을 건 싸움을 해왔다.
하일랜드 지방의 스페이 강 유역에는 수많은 밀조업자들이 은신하게 되었다.
거기는 품질 좋은 양조용수가 풍부했으며, 연료인 피트가 무진장 매장되어 있었다.
특히 상류인 리벳 강 부근은 오지 중의 오지로서 밀조자들이 숨기에 좋은 장소가 많았다.
그들은 단속원들의 눈을 피해 밤에만 증류를 하고 원액을 목통에 담아 동굴에 감추었다.
19세기 초 영국 정부는 밀조를 양성화하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밀조업자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정부의 정책을 믿으려 하지 않는데다 밀조업자들끼리의 묵계를 깨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1824년 마침내 용감한 청년 조지 스미스는 정부로부터 최초로 위스키 제조 허가를 받았다.
그는 샘이 좋은 곳에 공장을 짓고 이름을 더 글랜 리벳(리벳 강의 계곡)으로 하였다.
그 후 조지 스미스는 많은 밀조자들에게 생명의 위협을 받았다. 이에 방어하기 위하여 그는 항시 쌍권총을 차고 다녔다 한다.
오늘날에도 더 글랜 리벳 공장은 그때의 자리에서 계속 위스키를 생산하고 있는데, 그곳의 박물관에는 이 쌍권총이 진열되어 있다.
이 공장은 스코틀랜드 정부가 지정한 위스키 관광 코스이다.
더 글랜 리벳은 합법적인 공장이었으므로 설비를 마음대로 개량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이 공장 위스키의 품질은 최상급이라는 명성을 얻게 되었다.
더 글랜 리벳 공장이 날로 번창하자 다른 밀조자들도 차츰 허가를 받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더 글랜 리벳을 모사하여 유사 제품을 내었다. 이들은 더(The)자를 뺀 글랜 리벳으로 많이 통용되고 있다.
위스키 상품으로서 더 글랜 리벳은 12년생의 싱글 몰트위스키(한 증류소에서 생산한 몰트위스키로 만든 제품)이다.
상표는 스코틀랜드 국화인 빨간 엉겅퀴가 심볼로 되어 있다. 더 글랜 리벳은 풍부한 향과 감미로운 맛의 위스키로서 하일랜드의 대표적인 위스키이다.
초록색의 둥근 병에 빨간 마개로 장식 된 더 글랜 리벳은 스카치위스키가 동굴에서 밝은 햇빛의 세계로 나오게 된 최초의 스카치위스키이다.
캐나디언 위스키는 우리나라 애주가들에게는 약간 생소하다.
우리나라에는 주로 스카치위스키나 미국 버번위스키 또는 일본 위스키가 소개돼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캐나디언 위스키는 세계 위스키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스카치위스키 못지않게 높다.
캐나디언 위스키의 연원은 18세기 스코틀랜드인들과 아일랜드인들의 이민사와 같이 한다.
오대호 인근의 비옥한 평원에서 나는 귀리 호밀 등 곡물로 만든 위스키는 맛이 부드럽고 라이트한 특성이 있다.
특히 1929년부터 1933년 사이에 미국에서 시행된 금주령 시대에도 캐나다에서는 위스키를 지속적으로 제조해 왔다.
1934년 금주령이 해제되자 캐나디언 위스키는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미국에서 갓 증류한 버번위스키에 비해 숙성된 캐나디언 위스키가 부드럽고 향긋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카치위스키에 비해 향이 단조로워 값싼 위스키의 이미지를 지울 수 없었다.
1939년 크라운 로열이 발매되면서 이러한 인식은 깨졌다.
영국 왕 조지 6세와 엘리자베스 공주가 캐나다를 방문한 것을 계기로 많은 제조업체에서는 영국 왕 방문 기념 제품을 개발하였다.
영 연방인 캐나다에서는 최상품을 왕에게 헌납하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중 캐나디언 위스키 진상품으로 크라운 로열이 선정되었다.
세계에서 가장 고급스러운 위스키를 모토로 탄생한 크라운 로열은 캐나다 대륙을 횡단하여 밴쿠버로 가는 왕실 열차 안에서 처음 개봉되었다.
영국 왕의 상징인 왕관을 그대로 본딴 미려한 병에 담긴 호박색 위스키는 현란한 빛을 발했다.
캐나다 귀리와 호밀을 원료로 만든 이 위스키는 부드럽기가 비단 같다. 이 병은 처음이나 지금이나 금색 끈으로 장식한 융단 주머니에 담겨 있어 한층 품위가 돋보인다.
크라운 로열은 엘리자베스 공주가 에든버러 공과 결혼식을 올릴 때와 엘리자베스 여왕 대관식에 진상되었다.
1948년 영국 왕실은 크라운 로열에 대하여 감사의 서한을 보냈는데 이로서 크라운 로열의 명성은 더욱 높아지게 되었다.
1980년대 후반부터 미국, 일본 등 선진국의 위스키 시장은 점차 축소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크라운 로열의 판매량은 꾸준히 늘고 있다. 크라운 로열은 캐나디언 위스키의 대부로서 자리를 확고히 구축한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미국 교포들 소개로 최근에 들여왔다.
크라운 로열은 캐나디언 위스키의 전반적인 특징인 가벼움을 지니면서도 과일 향과 백합 향이 은은하게 스며 나오며 부드러운 맛이 특징이다.
스코틀랜드 최대도시 글래스고우에서 잉글랜드 서북부 도시 카알라일 사이에 있는 아이어셔에서는 많은 인물이 배출됐다.
스코틀랜드의 영웅 로버트 부르스(영화 ‘브레이브 하트’의 주인공)와 민족시인 로버트 번즈의 고향이기도 하다.
아이어셔는 1820년 존 워커가 사업을 일으키면서 사업가의 고장으로 변신했다.
존 워커는 산업혁명으로 번창하는 아이어셔의 중심지 킬마녹에서 일찍이 스카치위스키를 판매했다.
킬마녹 주변에는 양질의 노천 탄광이 펼쳐져 있어서 철도가 부설되었고 방직 공업도 발달하였다.1850년께부터는 잉글랜드 상인이 붐비게 되었다.
이때 잉글랜드에서는 증류주로서 고급주는 브랜디(Brandy)가 저급주로는 진(Gin)이 주로 소비되었다.
존 워커는 아들 알렉산더와 함께 자기가 블랜딩하여 제조한 스카치위스키를 판매하였다.
상인들은 점차 이 위스키에 반하여 대량을 사다가 잉글랜드에 팔기 시작했다. 알렉산더 워커는 상술이 뛰어나 사업을 더욱 번창시켰다.
1852년 스코틀랜드 서남부에는 대홍수가 일어났는데 킬마녹을 황폐화시켰으나 알렉산더 워커는 이에 굴하지 않고 런던으로 이전하여 다시 사업을 시작했다.
그는 두 마리의 나귀가 끄는 마차를 특별 제작하여 그것을 타고 시내를 돌아다녔다.
알렉산더는 자기 부친의 애칭인 ‘조니워커’를 상품명으로 하여 위스키를 발매했다.
마차에는 숙성된 위스키와 조니워커가 걸어가고 있는 모습을 간판처럼 그려 넣었다.
1908년 유명한 조니워커 상표가 디자인 되었다.
중절모를 쓰고 가죽 장화를 신은 영국 신사가 만면에 웃음을 띠고 씩씩하게 걸어가는 모습이 조니워커 위스키의 심벌이 됐다.
문구 또한 이 디자인에 잘 어울리는 것이었다.
‘1820년에 태어났지만 아직도 건재하다.(Born 1820 Still going strong)’
오늘날까지 이 상표의 디자인은 상표의 모델로서 꼽힌다. 전문가들로부터도 찬사를 받고 있는 상표이다.
위스키 조니워커는 스코틀랜드의 서남쪽에서 탄생되어 그쪽 지방에 있는 아일레이, 캠블튼 원액의 특징을 갖고 있다.
즉, 피트(Peat)향이 비교적 강하여 우리나라 소비자들에게는 향이 약간 짙게 느껴질 것이다.
조니워커는 시리즈 상품이 개발되어 있다.
스카치위스키 중 가장 많이 판매되는 브랜드인 조니워커 레드는 스탠더드 급이다.
1960년대만 해도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위스키는 조니워커와 짐빔인데 해방 후 미군의 주둔지에서 흘러나온 제품의 대부분이 이 두 제품이었다.
조니워커 블랙은 프리미엄급이며, 슈퍼 프리미엄급의 조니워커 블루가 있다.
6대에 걸쳐 독립적으로 내려오던 워커사는 현재 유디지(UDG)사에 소속되어 있다.
오늘날에도 국왕이 있는 국가에서는 왕에 대한 존경심이 대단하다.
왕과 왕족들의 일거수일투족이 시민들의 큰 관심사의 하나다. 태국과 일본인들의 국왕에 대한 존경심은 대단하다.
근대 민주주의의 산파역할을 했던 영국에서도 왕에 대한 충성심은 여전히 변함없다.
1세기가 지난일이지만 해가 지지 않는 나라를 건설했던 왕가에 대한 추억에서일까?
어쨌든 이들은 왕가의 일에 관여하려 한다. 따라서 왕자의 탄생이나 여왕의 즉위 등은 국민적 축제로 받아들인다.
우리나라에서는 각지의 특산품을 왕에게 진상하는 풍습이 있다.
이천 쌀이나 나주 배 등 진상품은 품질이 우수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기도 했다. 영국에서도 이와 같은 관행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스코틀랜드의 힐 톰슨사는 현 영국 여왕인 엘리자베스 2세의 즉위 때에 즈음하여 특별한 위스키를 헌납하기로 결정했다.
국왕의 대관식에는 21발의 축포를 쏘는 관례를 이용하여 21년생 위스키 개발을 준비하였다. 그 제품의 이름은 왕의 예포라는 뜻의 ‘로얄 살루트’로 결정되었다.
1950년 힐 톰슨사의 제품 디자이너들은 이 이름에 걸맞은 디자인에 골몰하였다.
에든버러 성에는 포신의 직경이 400mm나 되는 몽즈메그라는 거대한 대포가 있었는데 16세기에 이 포로 에든버러 성을 지켰다.
디자이너들은 이 대포의 포신을 본떠 도자기를 만들었다.
스코틀랜드인들은 이 대포를 스코틀랜드 수호의 상징으로 여기고 있다.
1952년 엘리자베스 여왕의 즉위식에는 로얄 살루트가 진상되었다. 이후 로얄 살루트는 최고급 위스키의 대명사가 되었다.
로얄 살루트는 군청색, 자주색, 짙은 갈색의 세 가지 병이 있다.
로얄 살루트는 위스키로서는 매우 드물게 코르크 마개를 사용하고 있다.
로얄 살루트는 융단 주머니로 포장하여 세계 위스키 애호가들의 소장품으로도 호평 받고 있다.
로얄 살루트는 현재도 모든 작업을 사람의 손으로 하는 정성스러운 수제품이다.
로얄 살루트는 하일랜드 몰트 원액만을 사용하여 지닌 잘 익은 과일향이 짙고 맛이 부드러워 목에 넘어갈 때 비단과 같은 느낌을 주는 게 특징이다.
여기에 사용하는 원액은 매년 숙성상태를 점검하여 오크통 하나하나를 특별관리하고 있다.
로얄 살루트의 자매품으로 ‘로얄 살루트 루비’라는 제품이 있다. 이 제품의 마개는 실제의 루비로 되어 있어 가격이 매우 비싸다.
40년 숙성된 이 제품은 원액의 희소성 때문에 한정된 양을 제조하여 일련번호를 매겼다.
로얄 살루트 루비는 명품 중의 명품으로 알려져 있다.